나를 위로하는 따뜻한
‘소고기 시래기 국밥’
글 _ 황인철 산부인과 과장전문분야 _ 산전관리, 고위험임신, 정밀초음파

가족여행의 꿈은 날아가고 몸도 마음도 지쳤던 연말
2025년 한 해도 저물어 간다. 사실 저문다는 표현은 한 살 더 먹게 되는 나이만큼 아쉽고 불편한 표현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새해에 대한 희망보다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아쉬움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대부분의 또래 친구들이 그러하듯,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좋았다. 차가운 바람에 들려오는 성탄절 종소리는 나의 마음을 설레게 했고, 붉은색으로 상징되는 성탄절의 불빛만 봐도 하늘에서 금방 루돌프가 뛰어내릴 것 같아 설렘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세월은 나의 마음을 간사하게 만들어 이제는 눈보다는 봄과 가을에 조용히 땅을 적시는 빗소리가 더 좋고, 연말의 시끌벅적한 모임보다는 집에서 조용히 커피 한 잔 내려 책을 읽는 여유로움이 더 좋으며, 연말에 온통 TV를 차지하는 시상식보다는 잔잔한 다큐멘터리 한 편이 나를 더 위로한다.
나의 기억 한편에 성탄절에 관한 일화가 있다. 10여 년 전 일이다. 수개월 전부터 성탄절을 맞아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기 위해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이 실행되기 바로 하루 전이었다. 외래 진료를 마치고 퇴근하려는 순간 분만실에 산모가 진료의뢰서를 들고 오더니 갑자기 분만실 문 앞에서 쓰러졌다. 손과 발이 점점 굳어지면서 경련 발작이 시작되었는데 혈압이 220/160mmHg이라는 간호사의 외침에 임신중독증 중증이라는 순간적 직감과 함께 미처 입원 수속도 하지 못한 산모를 안고 뛰었다. 수술은 신속히 진행되었고 1,800g 남짓한 신생아는 다행히 힘차게 울었지만 산모의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간수치는 800을 넘게 치솟고 있었으며 혈소판은 일만을 겨우 유지하는 정도의 ‘헬프증후군’까지 보였다. 산모가 의식을 찾지 못한 채, 그 상태가 일주일 동안 지속되었다. 평소 알고 있는 모든 신에게 기도를 해서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였던 나의 기도발도 이번에는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이 있을 줄이야. 어릴 적 내가 그리 원했던 로봇 선물을 안 줬다는 이유로 산타 할아버지와 절연을 했는데 감사하게도 그 해가 저무는 마지막 날 큰 선물을 주셨다. 산모가 기적같이 깨어난 것이다. 그해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는 행복한 꿈에 젖어 있었는데, 그 꿈은 깨지고 가족들의 원망만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지친 몸만큼이나 집이 멀게 느껴졌다. 친구들과 술 한잔 기울이면서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연말에 나의 응석을 받아줄 친구는 없었으며, 부탁조차 사치일 정도로 내 마음은 지쳐 있었다.
국밥 한 그릇에 희망과 행복을 담다
우리 몸의 시계는 정확하다. 긴장이 풀리니 잠 보다는 배고픔이 먼저 밀려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본능적으로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찾았다. 그냥 안쓰러운 나를 위로하고 싶었다. 거창한 재료는 없었다. 몇 주 전 사용하고 남은 무 반 개와 냉동실의 고기 한 덩이 그리고 얼려두었던 시래기 한 줌을 냄비에 넣고 푹 끓여냈다. 들기름과 조선간장으로 간을 한 고기가 볶아지면서 풍기는 냄새는 위로까지는 아니어도 일단 나의 마음을 조금 안정시켰다. 그리고 솥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고깃국의 육수가 무조건 맛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희망이라는 것이 생겼다. 밥이 다 되어가는 압력밥솥의 칙칙거리는 소리는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초록색의 소주 한 병은 최고의 피로회복제가 되었다. 그날 밤, 앞으로는 신을 애타게 찾게 되는 힘든 삶보다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행복을 꿈꾸며 푹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삶은 변화가 없다. 굳이 변화라고 하면 가족여행을 계획할 여유마저 없어졌다고 할까? 아무래도 그날 신께 평생 부탁할 양의 절반을 미리 쓴 것 같아 조금은 씁쓸한 연말이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절연한 산타 할아버지를 한 번 본 것으로 만족한다.
소고기 시래기 국밥
재료 소고기 한 근, 데친 시래기(무청) 한 줌, 무 반 개, 다진 마늘 크게 1스푼, 조선간장 2스푼, 들기름 3스푼, 고춧가루 1스푼, 된장 1스푼, 대파 반 대
1 소고기를 먹기 좋게 자른다. 냄비에 들기름을 두르고 소고기를 볶은 다음 조선간장으로 간을 한다.
2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을 넣고 같이 볶는다.
3 물을 붓고 대파 반 대를 썰어 넣은 후 40분 정도 끓인다.
4 시래기를 깨끗이 씻은 뒤 물기를 꼭 짜서 들기름, 고춧가루, 마늘, 된장으로 간을 한다.
5 끓고 있는 냄비에 시래기를 넣고 20분 더 끓여 마무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