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AUTUMN vol.155
ISSUE HEALTH COMMUNICATION
특별기고

살구나무 숲 그늘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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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반칠환 시인

코로나19가 지구촌을 휩쓰는 동안에도 살구나무는 해마다 꽃을 피웠다. 사람들이 봄을 잊고 있을 때도 눈부신 꽃등을 켜 봄을 알려주었다. 웃음을 잃은 사람들의 창백한 얼굴에 더러 미소를 머금게 했다. 사람들이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 동안에도 살구나무는 한결같이 제가 선 자리를 지켰다. 자신만의 안위를 위하여 담장 안에 숨지 않았다. 아픈 꿀벌들이 꽃의 심부를 드나들 때마다 꿀과 꽃가루를 처방해 주었다. 사람들이 영업시간과 사적모임 인원제한을 둘 때도, 살구나무는 꽃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살구나무가 코로나19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살구나무를 쳐다볼 새도 없이 바빴을 것이다. 살구나무는 내력이 있다. 옛사람들의 「나무타령」 한 대목만 들어봐도 살구나무가 얼마나 삶에 희망을 주는 나무인지 알 수 있다. ‘대낮에도 밤나무, 방귀 뀌어 뽕나무, 오자마자 가래나무, 깔고 앉아 구기자나무, 칼로 베어 피나무…’ 뜻밖에도 대개의 나무들 심보가 사납다. 이른바 동방예의지국에 살면서도 예의범절을 모르거나, 심지어 섬뜩하지 않은가? 그런 가운데 ‘거짓 없어 참나무, 입 맞추어 쪽나무, 너하구 나하구 살구나무’가 나오니 노래할 맛과 살맛이 나지 않는가.

안다. 대체 누가 요즘 「나무타령」을 기억하겠는가. 아재 개그 같은 살구나무 송에 누가 삶의 의지를 불태우겠는가. 뿌리 깊은 고사를 하나 더 들어보겠다. 잠깐 타임 슬립을 경험해 보자. 호텔스닷컴도, 땡처리 항공권 예약도 필요 없다. 잠깐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된다. 지금으로부터 1,800여 년 전 『삼국지』의 무대인 중국 오나라 여산이라는 곳으로 가 보자. 유비·관우·장비 광팬이라도 일단 이곳부터 들르자. 촉나라는 자유여행으로 다녀가시라. 여산에는 화타, 장중경과 함께 당대 세 명의 신의(神醫) 중 하나로 불리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동봉이라는 사람이다.

신의답게 신이한 행적이 이채롭다. 얼마 전에는 교주라는 곳으로 여행을 갔다가 죽은 지 사흘째 되는 자사(刺史)를 살려냈다. 극진한 대접을 뿌리치고 돌아가려 하자 말과 가마를 내주었다. 동봉은 뜻밖에 관 하나를 부탁해 그 속에 들어가 누웠다. 얼마 뒤 사람들이 뚜껑을 열어보니 그는 간데없고 비단 한 조각만 남아 있었다. 그 시각 동봉은 여산에 도착해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병을 치료했지만, 돈을 받지 않았다. 대신 환자의 병이 나으면 의원 앞뜰에 살구나무를 심도록 했다. 병이 중했던 사람은 다섯 그루를, 병이 가벼웠던 사람은 한 그루를 심게 했다. 세월이 지나자, 의원 앞은 살구나무 숲이 우거졌다. 동봉은 살구나무 숲 그늘에 창고를 지어 놓았다.

살구가 먹고 싶은 사람은 곡식 한 그릇을 가져다 놓고 살구 한 그릇을 가져가게 했다. 이를 어기면 살구나무 숲을 지키는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니 속일 수가 없었다. 곡식이 쌓이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니 마을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어지고, 질병도 사라졌다. 그는 삼백 살을 살다가 구름 속으로 사라졌는데 그때까지 서른 살 젊은 의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뒤로 사람들은 훌륭한 의사를 보거나 의원이 생기면 행림(杏林)이라고 불렀다. 『신선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래도 코로나19의 극복과 살구나무 숲이 무슨 연관이 있냐고 묻는 사람을 위해 지난봄의 기사를 준비했다.

‘코로나19 발생 초기부터 확진자 진료에 최선을 다해 가장 많은 환자를 치료한 서울특별시 서울의료원은 현재도 전담병상을 운영하면서, 진료 정상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이 의료원은 2020년 2월 20일에 감염병 전담병원으로 지정되어 전국에서 단일 병원으로는 가장 많은 환자를 치료했다(2023년 5월 12일자 <후생신보> 기사).’

오나라 동봉과 그가 운영하던 의원이 연상되지 않는가?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팬데믹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일상을 무너뜨렸다. 그런 가운데 모범적인 방역과 치료로 세계 각국의 주목을 받은 K 방역은 대한민국의 국격을 세워주고, 국민들로 하여금 선진 시민으로서의 자존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우리나라에서 단일병원으로 가장 많은 환자를 치료한 서울특별시 산하의 이 공공병원이야말로 동봉의 ‘살구나무 숲’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살구나무가 미세먼지 속에서도 꽃 문을 활짝 열 듯, 모두가 접촉을 꺼리는 전염병 대유행 속에서도 병원 문을 활짝 열고 환자들을 보살펴야 했던 의사와 간호사와 직원들을 생각한다. 발열 체크와, PCR 검사를 하고, 오염된 곳을 소독하느라 방호복 속에 땀이 흥건했을 것이다. 위생장갑 속 지문을 알아볼 수 없게 부르튼 손을 내보인 간호사를 생각하며 ‘행림’의 연원을 새삼 돌아보았다.

살구나무는 옛사람들에게 소중한 봄 과실나무였다. 절로 신 침이 도는 살구는 보릿고개를 넘어온 사람들이 그 해 처음 맛볼 수 있는 열매다운 열매였다. 주린 배를 채워주고 막 시작된 농번기에 힘을 내게 해 주었다. 행인(杏仁)이라 불리는 살구씨는 집집마다 상비약으로 갖추어 여러 증상에 요긴하게 썼다. 눈길을 사로잡는 분홍색 꽃구름은 수많은 시인과 가객이 다투어 노래하게 했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는 시조 한 구절과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노래 한 소절쯤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장소와 고향상실이 가속화되는 지금도 살구꽃만큼은 마음속 고향을 오롯이 지키고 있다.

올봄을 환하게 밝혔던 살구꽃도 지고, 코로나19 팬데믹도 해제되었다.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사람들이 점차 일상을 회복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고 함께 살아가야 할 풍토병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제 우리가 겪은 일들의 원인을 차분히 짚어보며 새로운 감염병 유행을 막는 일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과제일 것이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도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헌신적으로 행림의 정신을 실천한 의료인들에게도 면목 없는 일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두기를 강제했던 코로나19는 사람이 야생동물과의 거리 두기에 실패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박쥐나 천산갑이 보내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져온 것이다. 이미 사스와 메르스를 통해서 경고받은 바 있지만, 인구 80억을 돌파한 호모 사피엔스는 지금도 숲을 무너뜨리며 야생동물의 터전을 좁히고 있다. 단지 한 종의 안전을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아니라 지구 생명의 공존을 위한 생태적 거리 두기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반칠환 시인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2002년 서라벌 문학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시집 ‘새해 첫 기적’,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웃음의 힘’. 시선집 ‘누나야’. 시평집 ‘내게 가장 가까운신, 당신’. 장편동화 ‘하늘궁전의 비밀’, ‘지킴이는 뭘 지키지?’. 인터뷰집 ‘책, 세상을 훔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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